아직 부끄럽지만 자칭 타칭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본디 ‘철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소양이나 관심이 적습니다. 그래서 골치 아픈 철학 논의들을 어쩌다 들여다보면, 저의 천학비재는 탓하지 않고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들’ 아니면 ‘한가한 사람들의 말장난’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때도 많지요(철학도 분들에게는 죄송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내건 글의 제목이 꽤 고전적인(?) 철학 용어인 듯해서 스스로 좀 어색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더 마땅한 말이 잘 떠오르질 않는군요.
먼저 두 용어를 상식 수준에서 잠깐 비교해 보겠습니다. 진리(truth)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 가운데 주로 귀에 연관됩니다. 곧, 듣기입니다. 이 진리는 말을 통하여 주고 받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 사람의 근본적인 삶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고(思考)’와 ‘의미(意味)’의 세계입니다(여기서 ‘자연 법칙’이란 말과 거의 비슷한 뜻을 지닌 ‘과학적 진리’는 일단 논외입니다). 실체(reality)-‘실재(實在)’라고 해도 좋겠습니다-는 주로 눈과 연관되며(물론 이미지로 우선 들어오지만 이미지 자체만은 분명 아닙니다), 코와 혀와 피부도 그것을 파악하는 데 얼마간 도움을 줍니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物質)’ 혹은 ‘사실(事實)’의 세계를 가리키는데,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날마다 움직이며 생존을 해 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그 세계를 얼마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글’도 어디까지나 기호로 표현된 ‘말’이기에 진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게 맞겠지요.)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섞이면서 우리의 복잡한 삶을 이루지만, 진리와 실체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영역 또는 차원에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서로를 보완하고 하나-‘진실’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겠네요-가 될 때 우리의 참된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이 진리와 실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은 ‘말씀’이란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엇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고 ‘실체’를 지니면서, 눈에 보이도록 드러났습니다. 말씀이자 진리 자체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과, 그가 세상에 계신 동안 하신 모든 사역-선포와 가르침, 치유, 축사, 죽음과 부활 등-이야말로 진리와 실체의 참된 관계가 어떠해야하는가를 가장 극적으로 알려 줍니다.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없는 복음은 불완전하거나 그릇된 복음입니다. 한편, 진리(말)로써 그 의미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선한 행동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는 불완전한 것이라 봅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로 돌아가며, 오직 그분만이 마지막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되어 빨려 들며 읽은 책 가운데, 우리나라의 어떤 감리교 목사님이 쓰신 <자기비움의 길>(1,2,3권)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언자 영성’을 열쇠말로 삼아 구약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꿰뚫어 정리하면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사역의 가장 중요한 전략은 바로 ‘보여주는 선교’라고 말합니다. 곧, 이 땅에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온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천하 만민이 그 본을 따라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의 핵심에 바로 레위기의 안식법과 희년법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율법이 말하고 있는 거룩한 나라란 다름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신분·재산·교육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적어도 대를 이어 그러한 불의가 지속되지 않는-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입니다. 거룩한 나라를 이루라는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나라가 망해 온 세상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셨고, 이후 초대 교회가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그 사명에 충성하면서 복음은 결국 로마제국을 굴복시켰지요. 바로 거룩한 나라를 이룰 절호의 기회-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비견되는-를 맞이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사명을 잊은 채 점차 특권층이 되고 오히려 힘없는 사람들에게 뺏은 거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데다, 헬라의 이원론 등에서 비롯된 수도사 영성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면서 복음은 왜곡되고 세상은 교회에 등을 돌렸으며, 결국 이 땅 가운데 온갖 재앙-이슬람 확산, 공산주의 혁명, 세계대전 등-이 초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새 천년과 함께 다가온 영성의 시대-특히 한국 교회에 주어진 커다란 기회인-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인 ‘예언자 영성’을 바탕으로 그 사명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어떻습니까? 돌아가신 대천덕 신부님의 가르침과도 상당부분 통하면서, ‘희년함께’의 동지들인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지요?
10여 년 전 성토모 시절부터 미력이나마 이 사역에 힘을 보태던 제게, 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지공주의 사상을 들은 사람들에게, “뜻은 좋은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과연...” 아니면 “그럼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게 하나 있었지요.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진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어느 정도 설득이 된 듯하면서도, 막상 함께 행동으로 동참하는 이들은 적다는 사실은 그러한 생각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기도와 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과거 다른 나라들의 몇몇 사례를 들어 답변하기도 하고, 거대한 구조 변혁의 어려움 또는 불의한 제도 속에 있는 개인의 무력함 등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역시 문제의 본질은, ‘진리’를 지금 여기서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진리를 앞장서 주장하는 우리들이 과연 그 진리를 다른 사람이 제대로 느껴 알 수 있도록, 곧 실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앞에서 잠깐 살핀 것처럼, 하나님의 전형적인 방식인 ‘보여 주는 선교’를 우리는 과연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온 나라 규모의 제도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도, 온 교회 전체의 각성이 일어나기 전에도, 먼저 진리를 알고 있는 우리들이 그 진리의 실체를 얼마간이라도 보여주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물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눈으로 보여 주어야만 진리로서 제 힘-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유’를 주는!-을 발휘하지요. 바로 며칠 전,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으로 이름난 안철수 교수의 인터뷰기사에서 읽은 게 기억이 납니다. 벤처기업 붐이 한창 일어날 때, 거기 뛰어든 사람들이 거의 말과 홍보 전략을 앞세우다가 실패하였으나, 자기는 행동과 결과로서 결국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업 경영과 우리의 사역은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있고, 우리는 ‘성공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변함없이 통하는 진실을 가르쳐 줍니다. 곧, 보통 사람들에겐 역시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진실입니다. 결국 힘 있고 똑똑한 소수의 사람들을 잘 준비된 말로 설득해서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생각은 단순하되 온몸으로 이 팍팍한 세상 현실을 감당해 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여 줌으로써 작은 변화부터 이끌어 내는 일이 더욱 시급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제가 알기로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 본래의 성장 방식이기도 하구요.
기도하며 바라기는, 우리 안에서도 희년 정신과 지공주의를 작은 규모로나마 직접 보여줄 수 있는 노력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희년 기금’ 등을 만들어 뜻있는 교회나 신자들이 부동산 불로소득이나 여유 토지 등을 기부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그 기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활이나 임대 주택 제공 등에 쓰는 일은 어떨까요. 지금 ‘아름다운 재단’ 같은 곳에서는 갖가지 이름과 목적을 가진 기금들이 따로 만들어져 계속 기부를 받으며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희년 기금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비록 작게 시작할 수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지공주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희년 마을’을 세워 나가는 일도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널리 알려진 미국의 페어호프나 아든 마을 같은 곳을 잘 연구하여 참고하면서, 우리나라의 여러 생태 공동체(마을) 운동들과도 서로 배우며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나간다면 예상보다 일이 수월히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도전하고 모험을 감행하는 자들에게 그분은 기꺼이-물론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그분의 때에-기적을 베풀어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노파심에 하나 덧붙이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혹시 우리의 사역 가운데 전파, 교육, 홍보 등의 중요성을 평가절하 하거나 비판하는 뜻으로 비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곧, 그것들을 보완하여 좀 더 온전케 하는 데 초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서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라”고 하심으로써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지요. 그 때, 먼저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뒤에야 병을 고쳐 주십니다(마태9:1~8). 그 까닭은 바로, 우리의 모든 선행이나 수고로 이루어진 ‘실체’가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알기 쉽지만-성경본문 속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도 나오지요-그 자체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진리’ 안에서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되어야만 제자리를 찾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곧, 진리와 실체는 서로 도우며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