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귀와 마음 열기 강빛나래 /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간사 몇 주 전 집으로 헨리조지의 경제사상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토지와 자유 (Land & Liberty)>란 잡지가 도착했다. 영국 헨리조지협회에서 1894년부터 발행해온 이 잡지는 현재 계절별로 일 년에 네 번 나온다. 사람들을 경제학의 진정한 핵심으로 이끈다는 모토 (putting people at the heart of economics) 아래 통간 1227호인 이번 봄 판의 주제는 “조지를 무시하다, 왜 영국 정치가들은 알기를 원하지 않는가.”이다. 이번 호에는 특히 영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어떻게 헨리조지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을 우리로 치면 ‘토지학교’, ‘희년학교’에 해당하는 ‘헨리조지 기초 경제학’ 강좌에 끌어다 앉혀둘 수 있을지 고심한 특별기고문이 낱장광고와 함께 딸려왔다. 요지는 왜 헨리조지의 사상이 대중에게 오늘날 더 이상 호소력이 크지 못한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생애주기별 연령집단의 특징과 필요를 분석하여 헨리조지의 사상을 어떻게 화면 효과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연대해야할까, 저자가 고민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전문은 아래에 있다. 이 글에서 취업과 스펙에 바빠 그나마 재테크는 관심을 두어도 정치경제의 본질적 원리에 관심을 둘 여유는 점점 사라져 간다는 영국 대학생들의 모습이 한국과 비슷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난 기독청년아카데미 ‘희년학교’도 그렇고, 청년들이 한국 성토모에 계속해서 발걸음을 한다는 사실이 희망을 준다. 그들은 어떻게 성토모에 발걸음을 하게 된 걸까? 기독청년아카데미 또는 청어람아카데미, 성서한국대회, 복음과상황 잡지 등을 통하여 삶에 대해, 오늘날 발 딛고 살아가는 정치경제사회에 대해, 고민해보고 참여해보자고, 계속해서 메시지가 청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때문이다. 즉, 여러 기관들이 벌이는 활동과 여러 매체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들을 귀 있는 층, 씨앗을 심기 좋은 기름진 텃밭이 형성되는 중이다. 또한 비단 소위 복음주의라 자칭하는 협소한 집단을 넘어서서, 소위 무언가 사회 돌아가는 모습에 괴로워하거나, 궁금해 하는 이들, 변화를 원하고 꿈꾸는 사람들과 모임들은 모두 성토모에 있어 모두 말걸기의 대상, 씨앗 심을 텃밭, 연대의 대상이다. 얼마 전 고대생 김예슬 씨의 자퇴 선언이 사회에 적지 않은 공명을 불러일으켰듯이 시대를 고민하고 씨름하는 다양한 사람들은 주위에 찾아보면 곳곳에, 많이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자라나고 있는 메시지와 제대로 통하는 일이다. 그래서 갈수록, 이 운동의 지지자들을 얻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여기에 동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10분이고, 20분이고 일장연설을 할 수 있는 탄탄한 지식과 언변과 고집이 아니라, 소통하는 인격에 대한 민감함, 이해, 공감이 먼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상대가 다른 것에만 초점을 두고, 그 상대 나름 살아가는 진정성과 살아온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상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조차 놓쳐버리고 소통은 더 이상 진전하지 않는다. ‘희년’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토지정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고, 심지어 관심이 한 번도 안가더라 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 상대가 사람인 이상 경험해본 것, 살아본 것, 이미 느끼고 알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소통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미 있는 소통의 기반에 감사해 하며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 겸손하게 듣는다면. 세상에 10을 말하기 위해서는 100을 들어야 하는 것 같다. 귀와 마음을 열기! 어디든 공동체에 속해서 관계 가운데 부대끼며 귀와 마음을 쫑긋 세우고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토지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바람처럼 찾아오리라. 그리고 그 정의에 대해 다 이해하지 못하고, 다 깨닫지 못한 부분까지도 소통을 통해 더 이해하고, 더 깨닫는 경험을 할 것이다. 소통의 에너지는 사랑에서 오기에, 그래서 정의의 시작을 사랑이라 하나보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주셨다.
댓글 '5'고영근"정의의 시작은 사랑이다"
요즘 정의와 사랑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고민을 가끔씩 하고 있는데, 아주 귀중하면서도 충격적인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意)를 들어서 기쁘네요. 사실 처음 들어본 말인데 정말 깊은 울림과 깊은 뜻이 있네요. 일반적으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반대된다거나 사랑은 정의를 뛰어넘는다, 사랑은 정의를 완성한다, 사랑은 정의를 달성하고 정의를 뛰어넘는다, 정의는 곧 사랑이다, 정의는 확대된 사랑이다, 사랑은 사적이고 정의는 공적이다, 정의는 자연법이며 사랑에 의해 보완된다, 사랑은 정의를 포괄한다, 사랑과 정의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 사랑은 정의보다 더 높고 고결하다, 사랑이 제일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정의 앞에 사랑이 먼저 오는 "정의의 시작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이 정말 큰 임팩트를 주네요. 기독교사회윤리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절대적인 아가페 사랑의 규범을 사회에서 어떻게 정의라는 근사치적인 정책으로 옮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사랑과 정의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인데, "정의의 시작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주셨다"라는 말이 일말의 해답의 빛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암튼 좋은 통찰을 얻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빛나래 자매님. 칼럼 내용도 너무 좋아요. 응암동에 수다 떨러 한번 가고 싶네요. ㅋ 샬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