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토지 소유권에 관해 크게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사적 소유와 공동 소유입니다. 사도행전, 특히 성도들의 친교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소유 개념은 자발적인 공유이며, 공산주의에서처럼 공유를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토지 소유권에 대한 개념은, 사적 소유입니다. 곧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지요. 그 뿌리는 도미니움(dominium), 로마법에서 파생된 소유권 개념입니다. 곧 개인이 소유지에 관한 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로마가 아직 작은 왕국이었을 때는, 도미니움이 가족 단위의 토지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정복을 거듭하면서, 도미니움의 본래 의미는 그 정복에 참여한 황제와 장군, 귀족들이 광대한 토지를 절대적이고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권리로 변천했습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사병들은 거대한 부와 사치를 쌓기 위한 목적으로 싸우고 죽는다. 정작 그 사병들은 그들 자신이 발 디딜 땅 한 평도 갖지 못하는 채 말이다." 심지어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부터 플리니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토지독점이 로마를 망쳐놓았다."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에 도착하기 전, 토착민들이 가졌던 소유권에 대한 철학은 "우리의것"을 뜻하는 두 필리핀 단어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배타적으로 우리의 것임"을 뜻하는 아민(amin)이란 용어는 여타 마을들이 아닌 어느 특정 마을이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땅을 뜻했습니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것임"을 뜻하는 아띤(atin)이란 용어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각각 (everyone)을 포함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땅은 아민(배타적으로 우리의 것임)이고, 강물의 경우는 아띤(포괄적으로 우리의 것임)이었습니다. 그 후 스페인 사람들이 왔고, 도미니움이란 개념을 들여와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경적 소유권
성경은 도미니움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소유권이 두 종류로 등장합니다. 한 가지는 인간이 노력하여 얻은 것에 대한 소유권이고, 또 한 종류는 인간이 무엇을 했든지 그에 상관없이 원래 존재하는 것에 대한 소유권입니다. 후자는 인간이 더불어 거주하는 들판이나 자연환경, 사람들이 필요를 공급받는 창고, 인간의 노동이 가해질 수 있는 원자재와 에너지원을 포함합니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직접 만든 것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반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5장 9월은 말합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구약 선지자들과 같이, 기독교회 초기 지도자들은 도미니움을 매섭게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만든 것이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물질에 대한 절대적인 소유권을 허용(재가)했기 때문입니다.
부의 양극화
도미니움은 대개 부의 양극화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도미니움은 크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부자 몇몇과 지배받는 빈민 대다수를 만들어냅니다. 빈민이 부의 공정한 분배에서 한번 탈락당하면, 쉽게 계속 빈민으로 낙인 찍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교에서 주도적인 행위자로 초청하십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도미니움 아래 눌린 자들과 동일시하십니다.
공생하는 나눔(Symbiotic Sharing)과 선교
이러한 이해를 갖고서, 저는 마닐라 슬럼지역에 살거나 또는 루존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에 사는 땅없는 필리피노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토지소유권은 마땅히 공생하는 나눔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토지소유가 "(타인에 대한) 공감"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내 것"과 "우리 것"이 서로와 환경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가운데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양상(a thoughful synchronicity between "my having" and "our having")과도 같습니다. 또한 오직 "내 것"만을 축적해가는 것과도 다르며, 다른 이들이 일정한 양을 똑같이 분배하도록 강제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공생하는 나눔은 다른 이들의 소유와 나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소유하고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이에 반대하는 개념은 다른 이의 몫에 기생하여 끊임없이 축적하는 것(parasitic saving)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즉, 다른 이들이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끊임없이 소유해가려고 하는 것이지요. 매일 삶에서, 땅없는 이들은 여가 시간이란 게 없습니다. 그들이 일하길 멈춘다면, 곧바로 하루 살 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땅없는 이들은 사회에서 사회경제적으로 힘없는 계층에 속합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곧 "피플 파워-참여의 힘, 대중의 힘"를 통해서 입니다. 숫자가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갖는 힘은 끊임없이 연대라는 행위를 통해 조직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들 가운데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단지 땅없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없는 이들과 '함께'입니다. 그들을 주님의 온전한 복음으로 세움으로써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근본 사명은 초기 기독교회가 그러했듯이 성경적 소유권의 원칙과 실행을 가르치고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음식과 재화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랑을 나누길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 구원의 주님을 높이기 원한다면, 교회는 만연해있는 도미니움의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싸워야합니다. 교회는 소유권에 대해 이미 가르치고 시행하고 있는 관행에 대해서 진실하게 자기성찰을 하고, 자기정화를 함으로써, 새 가죽부대를 준비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불과 천여년 전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어떻게 무슬림이 되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땅없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따랐습니다. "토지는 알라에게 속했다!". 따라서 교회는 오늘날 공생하는 나눔을 촉구하는 땅없는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끝으로, 토지소유권 분쟁은 선과 악 사이의 분쟁입니다. 교회는 중대한 사명에 부름받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토지권을 둘러싼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분투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도미니움의 세상에서 그들이 비록 미미해보일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최재형 목사는 Global Ministries 소속 선교사로 Cavite, 다스마리나스에 위치한 유니언신학교에서 열리는 필리핀 연례 컨퍼런스를 섬기고 있다. 한국 출신으로, 현재 토지사역센터(the Center for Geocentric Ministries)에서 일하고 있다. 토지사역센터는 신학교 교과로서, 토지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훈련하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성직자와 평신도가 하나님의 창조를 구속, 회복시키는 정의롭고도 충직한 청지기가 되도록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최재형 선교사 아내인 최그레이스 목사는 Harris Memorial College와 함께 공동체 아웃리치 사역들을 섬기고 있다.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필리핀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희년과 토지정의를 전파하고 계시는군요. 희년함께 사무실 냉장고에 최재형 선교사님 가족사진을 붙여놨는데,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니 더 반갑네요. ^^ 토지문제가 정말 심각한 필리핀에서도 최재형 선교사님을 통해 해외 희년학교를 한 번 개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나래 자매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