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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이란 무엇인가4]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리얼리스트, 새맘교회 박득훈 목사

작성자 : 관리자 (175.211.189.***)

조회 : 2,709 / 등록일 : 19-03-01 16:19

[희년이란 무엇인가? - 희년함께 연재 기획 인터뷰4]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가져라!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리얼리스트, 새맘교회 박득훈 목사 

 

  

 

 

박득훈 / 희년함께 자문위원

 

 

자기 소개 및 하시고 계신 사역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목회자입니다. 새맘교회 전임목사로 일하고 있고 한동안 몸담았던 다른 활동들에서는 물러나 있어요. 지금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유일한 활동은 한미FTA폐기기독교연대 공동대표로 섬기는 것입니다. 평화누리에도 어느 정도 관여해 왔었는데 앞으로는 평화누리에 좀 더 열심히 몸을 담고 일하면서 경제정의실현을 통한 평화의 성취, 샬롬을 한국사회에 이뤄보고 싶은 마음이 제 마음 속에 강하게 담겨져 있어요.  

   

목사님께서는 지난해 한미FTA 반대하시면서 국회 점거하셨던 열두 분의 목회자 중 한 명이십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몸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데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몸으로 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한 교회를 맡아서 섬기고 있는 목회자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몸을 던져서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순간에 저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죠. 생각 같아서는 김진숙 씨, 전태일 열사 같은 분들처럼 정말 현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데 제가 그런 용기도 부족하고 그런 은사도 부족합니다. 저는 그냥 현장에서 실천해야 할 때는 두려움없이 실천하면서도 약간은 일선에서 물러나 사람을 끊임없이 키워내고 분위기를 만들고 하는 일에 저에게 좀 더 주어진 은사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현장에 발 하나 딛고 목회 현장에 발 하나 디뎌 놓으면서 양 쪽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신앙의 동력이라고 하면 저를 구원하신 예수님이죠(웃음).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1학년이에요. 미션스쿨인 대광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때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했죠. 중고등학교 6년동안 기독교의 아주 좋은 분위기 속에 있었어요. 60년대만 해도 기독교가 지금처럼 타락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아주 건전한 청년문화가 교회 안에 있었고, 민주주의도 교회 안에 가장 발전되어 있었어요. 저는 예수님을 뜨겁게 만났다기 보다는 어떻게 보면 교회 안에서 청소년 시절 보호를 받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사회문제나 경제문제에 신앙적 동기를 가지고 깊은 관심을 갖지는 못했고요. 제 자신이 가정에서 가난을 경험을 하고 제 주변을 보면서 처절한 가난을 보았어요. 제가 청계천 주변에 살았거든요. 그 당시에만 해도 청계천 변에 판자촌이 있었죠. 한번 불나면 2-300가구가 불타버리고 하는 그런 것을 중고등학교 시절 청계천 둑을 걸어 다니면서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들을 보면서 가난이 정말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에너지는 근본적으로 청소년 때에 받은 양심의 소리, 이건 아니다, 양극화․빈부의 격차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제 양심의 소리, 아마 제가 제 아버지로부터 그런 DNA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연대 경제학과에 다니실 때 운동권이셨나요?

 

아니에요. 그런데 한참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저희 아버님이 젊은 시절 일본에서 좌파 경제학을 공부하셨더라고요. 아마 제 피 속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좌파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시절에 당시 공산당보다 무섭다는 대학생성경읽기회(UBF)를 다녔는데 기독교신앙과 사회참여에 관련된 직접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제자를 훈련시키고 세계를 선교하면 역사가 바뀌고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은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회변혁이나 역사변혁에 대한 비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그 방법론이 직접적인 사회참여라든지 정치운동보다는 제자를 제대로 키워내면 그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단순논리에 갇혀 있었던 거죠. 

 

1983년에 런던 바이블 칼리지로 유학을 가서 신학을 접하면서 그때 처음으로 제가 하나님나라의 실현과 세상의 변화, 이건 굉장히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제자를 많이 키워서 세상에 보내도 그 제자가 사회변혁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 구체적인 비전,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절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경제정의가 무엇인지, 사회체제와 구조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씨름을 하기 시작했죠.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대안적 신학을 접한 것인가요?

 

그때 제가 참 놀랐던 것은 구약을 공부하든, 신약을 공부하든, 조직신학, 교회사를 공부하든 거의 모든 신학의 분야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해가는 나라라는 흐름이 각 과목마다 다 스며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저에게는 굉장한 신학적, 신앙적 회심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도 만났죠. 지금 에스라 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신약학 강의를 하고 있는 양용의 교수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자, 시골교회, 무교회지역에 엄청나게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친구랑 같이 3년 동안 공부하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땅의 사회적 약자,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들을 함께 나눠야 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정말 깊이 성찰해야겠다는 각오를 늘 새롭게 다졌죠.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학문적 기풍이 개혁적, 사회참여적 기풍이었나 보네요.  

 

그 당시에 정말 그랬어요. 1980년대 중후반, 그 당시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석사 과정이 있었고, 로잔언약의 기풍이 신학교에서 그대로 이어져 가는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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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나 자본주의 등 경제정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경제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런던 바이블 칼리지를 졸업하고 더럼 대학교로 갔어요. 지도교수님 밑에서 경제정의를 공부하려다 보니까 제일 먼저 부딪히는 과제가 뭐냐면 그 당시 신자유주의는 경제정의를 신기루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지도교수님이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의 기반을 만든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가 쓴 『사회정의의 환상』이라는 책을 읽으라고 하더라구요. 사회정의는 신기루다라는 내용인데요. 지도교수님이 ’경제정의를 얘기하고 싶으면 이 책을 통과해야 한다. 이 책을 넘어서지 못하면 경제정의를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그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는 경제정의를 부정하는 것이구나, 경제정의와 자본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그때 제가 깊이 절감을 했어요. 

 

자본주의를 깊이 파고들어가면서 대학교에서는 주류경제학을 공부했으니까 박사과정에서는 주류경제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봐야겠다는 차원에서 맑스가 바라보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 맑스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정의, 이런 것들을 공부하게 되었죠. 

 

자본주의에 대해서 피부로 다가오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이렇게 빈부의 차가 심해서는 안된다, 뭔가 우리 사회가 잘못됐다’라는 생각들이구요. 박사과정에서 경제정의를 공부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좀 더 깊이 학문적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1997년에 귀국한 그해에 IMF가 터졌어요. 우리 나라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죠. 한국사회가 정신없이 신자유주의의 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이건 내가 사력을 다해서 저항해야 하고 싸워야 될 하나의 숙제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됐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목사님의 관점과 비판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2008년 금융위기론에 대해서 자본주의 체제 옹호론자들이 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느낀 점이 참 많았어요. 오히려 미국의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리었던 앨런 그린스펀의 고백은 참 정직했다고 봐요. 그는 청문회에서 자신이 믿었던 이데올로기, 즉 세상의 작동방식을 규정하는 결정적 기능구조라고 여겼던 모델(자유시장)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솔직히 인정해요. 자유시장은 자기조절능력이 있어 가장 효율적인 경제를 운영해갈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자인한 셈이죠. 

 

그런데 정작 미국 신자유주의의 주역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이 솔직하게 인정한 바를 그 아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아요. 예컨대 이렇게 설명하는 거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일부 월가의 금융자본가들의 무분별한 행동 때문에 그렇게 됐다. 그러므로 그들의 탐욕을 다스리고 금융감독기관에서 어느 정도 제재를 가하면 신자유주의는 다시 건강하게 부활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참 정직하지 못한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를 변호한다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고 거짓을 자꾸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는 진실을 추구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 제가 그것을 자꾸 거짓이라고 하냐면요. 원래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이념은 각자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혹은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활동을 할 때 경제는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기본적인 자본주의의 이념이에요.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을 기업정신이니, 창의성이 있다느니, 적극적이라느니 하면서 막 격려합니다. 그러다가 경제가 무너지면 탐욕이라고 막 공격을 해요. 이건 거짓이라는 거죠. 그러면 그것이 정상적인 경제의지인지 탐욕인지는 누가 구분을 하고 어디서 선을 긋느냐 하는 것이죠. 그건 도저히 어느 누구도 구별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는 것이죠. 그것은 굉장히 정직하지 못한 자본주의에 대한 변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구요. 

 

금융감독같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이제 와서 그때 금융감독이 허술해서 그렇다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굉장히 웃기는 얘기라는 것이죠. 그때 앨런 그린스펀에게 파생상품 감독해야 한다, 부동산 거품이라고 할 때 앨런 그린스펀이 절대로 규제하면 안된다, 파생상품은 기가 막힌 이윤창출의 도구고 창의적인 길이라고 하면서 규제, 감독을 거부했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개인의 어떤 이윤 추구를 규제하지 않는 게 원래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정신이죠. 그런데 이제 와서 감독이 부실해서 문제였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얘기라는 거죠.

 

원칙도 없고 오직 이윤의 극대화만 목적으로 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아니라 중상주의자들의 독점을 질타하던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도덕적인 가치관도 없고 기본적인 절제도 없고 규제도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오늘의 자본주의가 되어 버렸으니 법치가 있는 질성정연한 자본주의로 돌아가면 좋아질 것이라는 그런 얘기이죠? 저는 기본적으로 그런 분석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지난 2-30년간 지배했던 자본주의는 아담 스미스가 말했던 자본주의에도 미치지 못한, 소위 말하는 천민자본주의에 해당되는 거죠.  

 

온갖 부정과 불의, 부패가 난무하고 카르텔이 형성되어서, 실제로 공평한 자유경쟁마저 거의 불가능한 천민자본주의 시스템은 자본주의 기본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죠. 하이에크도 철저히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독점이 생기면 자본주의는 끝난다고 말했어요. 

 

부당한 독점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이고 자연스러운 독점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독점이 다시 경쟁으로 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하이에크의 생각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독점을 종종 정당화하고 독점에 대해서 별 문제의식이 없는 한국자본주의는 공평한 자유경쟁을 전제로 하는 원래의 자본주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은 맞아요. 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지지했던 제대로 된 자본주의도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 제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제대로 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와 기독교 신앙과 자본주의는 양립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목사님의 관점도 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인으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자본주의가 결정적인 면에서 진실보다는 거짓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제시스템의 맨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가치판단이 있고, 좋은 사회에 대한 가정이 들어 있어요.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체계적인 이념과 경제체제를 구축해나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경제체제논쟁을 할 때는 우선 각각의 체제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관, 가치관, 사회관 그리고 이념을 놓고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토론을 벌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세워진 사회분석적 이론들의 과학적 정합성을 논하면서 승부를 가려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실에 입각하고 다른 경제체제는 이념에 입각해 있다 이렇게 주장하면 대화가 안 되는 거죠. 저는 그 점이 정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역시 개인주의, 공리주의, 경제적 합리주의적 가치관과 윤리관을 갖고 얘기를 하는 것인데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가치 중립적인 사실로 포장하려고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아요. 진실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은 그런 자본주의의 거짓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구요. 

 

두 번째 이유는 자본주의가 결정적인 점에서 선 보다 악을 추구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 중 하나인데 선과 악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차선을 최선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면 그게 악입니다. 경제적 풍요,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이죠. 최고선은 아니에요. 최고의 선, 지고선은 하나님 자신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질세계의 풍요함이에요. 그런데 물질세계의 풍요함이 인간의 가치보다 위에 올라가고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가게 된다면 이것은 악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자본주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본주의는 경제적 풍요가 최고의 선이 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총체적 부의 극대화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공격을 하고 무엇이든지 저항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 전폭적인 사랑과 충성을 바쳐야 되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서운 도전이라고 봐요. 우리가 자본주의에 깊이 물들다 보면 전폭적이고 순수한 하나님사랑을 지켜내기가 어려워요.

 

왜 자꾸 기복신앙이 생기고 승리주의가 생길까요? 왜 하나님 믿고 부자되어야 한다고,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자꾸 생각할까요? 왜 우리가 성공해야지만 보다 더 하나님나라를 강력하게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부 자체, 성공 자체가 죄는 아니에요. 그런데 부와 성공이 절대화되는 것이 문제죠. 도대체 누가 이걸 절대화시켰느냐? 하나님이, 성경이 절대화시켰느냐? 가만히 보면 자본주의가 그것을 절대화시킨 거예요. 하나님은 부나 성공을 죄악시하진 않지만 항상 상대화시킵니다. 

 

그래도 좋고 안 해도 좋고, 그것이 쓰임 받을 수도 있고, 쓰임 받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절대화하고 그걸 목표로 삼게 만드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느냐는 것이죠. 성경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맘몬에서 나오는 거고 자본주의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지고선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강력한 저항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라는 책을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어요. 그 책에 보면 아주 정말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대목이 있어요. 

 

“성취와 충족이 패키지로 거래되고 욕망이 관리되며, 정치마저 경영화되고 소비자 중심경제가 지배하는 깊이 없는 사회에서는 신학적인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될 가능성조차 거의 없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심오한 정치적 도덕적 토론조차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영적인 향수 달래기에, 아니면 무가치한 세계로부터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데에나 이용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너무 깊이 있는 성찰이에요. 아까 제가 얘기했죠? 하이에크는 경제정의는 신기루라고 얘기했어요. 하지만 하이에크의 책을 읽어보니까 경제정의가 신기루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어요. 그럼 이 사람이 뭘 증명했냐면,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 사람이 증명한 것은 경제정의를 추구하는 것과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어요.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 해요. 자본주의가 살려면 경제정의가 사라져 주든지, 경제정의가 살려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변혁되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하이에크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적 토론도 못해요. 경제정의조차 토론이 허용되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더 깊은 차원인 하나님에 대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토론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자꾸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하나님,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할 수 있는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들, 그런 것들이 왜 지배하고 있느냐, 그리고 왜 자꾸 내세지향적인 신앙으로 빠지느냐?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기독교의 중심부를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웃사랑에 대해서도 허용을 하지 않아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인데. 첫째로 하나님사랑에 도전하고 두 번째로 이웃사랑에 도전하죠. 경쟁을 절대화하고 그리고 빈부격차를 정당화하고 그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좁히는 것이죠. 저는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는 아주 이상적인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양립할 수 없는 중요한 갈등지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어요. 

 

경제학은 가격은 알지만 가치를 몰라요. 사람을 몸값으로 계산하지 그 사람의 가치를 경제학은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다 가격으로 보잖아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장로가 빨리 됩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교회 안에 굉장히 깊이 침투해들어와 있는 거에요.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고 상품으로 생각하는 이 사고 구조가. 

 

자본주의가 내포한 가치체계의 문제를 통찰력있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혁명이나 점진적인 변화로 가능할 텐데 이러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회변혁이라는 것이 어떤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 같진 않아요. 사회변혁은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정말 기대치 않았던 순간에 결정적으로 엄청난 변혁이 또 일어나기도 해요. 그래서 거기서 무슨 기계적인 법칙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 봅니다. 

 

봉건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변혁되는 과정을 하나의 예로 보자면, 어느 순간에 결정적으로 봉건사회가 와르르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가 확 생긴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봉건사회라는 틀 속에서 저항세력들이 봉건 사회와는 다른 방식의 가치관, 다른 방식의 경제활동을 여기저기에서 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 정치적 힘을 가져왔고 결국은 봉건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지고 자본주의시스템이 하나의 정치경제 시스템으로 정착이 되죠. 그게 한 2-300년, 길게 보면 3-400년 걸렸단 말이죠. 1776년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건 실제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여기저기에서 싹트고 나서 최소한 3백년 이후에 나온 작품이에요. 

 

지금은 이 자본주의 문명이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 약간 꺼지는 순간이라고 보는데요. 한번에 자본주의 사회를 뒤엎어버리고 뭔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급진적인 전망을 갖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가 실제로 지금 현재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찾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사회변혁 운동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는 체 게바라의 말을 참 좋아해요. 

 

“우리는 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자.” 

 

저는 이게 사도바울의 정신이고 예수님의 정신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런 다양한 변혁을 시도하잖아요. 토지제도에 있어서 토지공공임대제를 도입하고 종합부동산세를 강화시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틀 내에서 뭔가 변혁의 몸짓을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여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축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타이밍이 올 것이라고 봐요.

 

예를 들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철의 장막이 무너졌다. 이건 하나님이 일반역사 속에서도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2-3년 사이에 동구유럽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아무도 상상을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식 가치관이나 체제와는 뭔가 질적으로 다른,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즉각적으론 무너뜨리지는 못하는 그런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추진되다보면, 어느 순간 흩어져 있던 흐름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통일되면서 강력한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펼쳐지지 않겠나 생각이 들어요. 저는 어떤 점에서 현실 타협적인 노선을 일시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현실주의자에요. 하지만 급진적인 전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현실주의자다 그렇게 저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싶어요. 

 

국가 단위에서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의 변혁적인 시도들을 시도하되 이윤 중심의 관계를 뛰어 넘은 교회나 작은 규모의 공동체들은 다양한 급진적인 시도들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지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면 토지의 상품가치보다 사용가치를 중요시 여길 수 있는 정책으로 갈 수 있도록 토지보유세 강화나 토지공공임대제 등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고 작은 규모의 공동체들은 공동체토지신탁 등과 같은 시도들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해서 해상수송이 쉬워졌잖아요. 그러면서 공장들이 세워지고 거기서 생산된 상품들을 해외에 팔고 이러면서 자본이 축적됨으로써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텄단 말이죠.  

 

그런 것처럼 지금 공동체운동이 새로운 세상의 맹아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원래 자본주의의 시작은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 -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로, 산업혁명 때 영국에서 공용지의 땅에다가 남이 사용 못하게 말뚝을 박는 것을 뜻함)을 통해 공유지를 없애면서 자본주의가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거예요. 그런데 지금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땅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거죠. 

 

원래 공동체라는 말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공유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을 뜻합니다. 땅의 공유가 없이 진정한 공동체는 없는 거죠. 땅을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은 자본주의에 맞서 소유 및 가치체제의 근원적인 전환을 도모하는 거죠. 

 

저는 그런 움직임들이 체계화되고 서로 연계되면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생산양식과 새로운 경제조정방식들이 좀 더 큰 틀에서 창의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기초가 다져지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실질적으로 자본을 독점하여 중앙에서 경제를 통제하는 구소련의 스탈린 공산주의, 중국 공산주의, 북한 공산주의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즉 바닥공동체로부터 의견이 수렴되어 올라오는, 민주적 경제운영 시스템이 새롭게 개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집니다. 

 

목사님께서 정의하시는 희년이란 무엇인가요?

 

희년선포는 속죄일에 시작되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경제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될 경제 윤리적 책임이 희년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희년에 담겨져 있는 경제적 가치관과 비전을 오늘날에 창의적으로 구현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보편화시켰습니다만 희년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나아가 사회참여를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할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희년 패러다임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면, 자유와 회복이라고 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이 두 가지를 강조했죠. 

 

희년의 첫 번째 특징 - 자유

 

희년을 알리는 나팔을 크게 불면서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저는 희년이 공포하는 자유라는 개념을 아주 좋아해요. 예수님께서도 희년의 맥락에서 포로 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러왔다고 그랬잖아요. 그 자유는 영적으로 보자면 죄로부터의 자유,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봐요. 그런데 사람들이 죄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정치경제적 삶의 분야에도 자유가 이루어져야만 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단으로부터의 자유가 정치경제적 관계에서의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로 확산되지 않는다면 그건 가짜라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땅이 없어서 억압을 당하는 그런 구조가 형성되는 것은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다 죄 때문에 그런 것이거든요. 죄와 어둠의 권세에 눌려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이익과 권력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자연히 정치경제 영역에서도 모든 억압관계를 청산하는 해방의 역사를 추구하는 사명에 눈이 떠지는 거죠. 

 

자유의 두 개념 -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자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자유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 자유입니다. 소극적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의에 의해서 내가 강요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적극적 자유라는 것은 자기의 신념과 비전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런데 희년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죠. 예를 들어, 품꾼으로 일하다가 희년이 되면 풀어나잖아요. 그 때부턴 자신의 몸과 삶이 더 이상 주인의 강압적 지시를 받지 않아요.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극적 자유에요. 오늘날 소위 자유민주주의가 얘기하는 자유는 바로 이런 자유를 의미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강제적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의 삶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 말입니다. 그 누구도 어느 신혼부부가 신접살림을 도곡동에 있는 삼성 타워팰리스에 차리는 것을 자의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희년이 추구하는 자유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희년이 되면 몸이 풀려남과 동시에 원래의 자기 땅으로 돌아가잖아요. 그 땅에서 독립적으로 자기의 삶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요. 땅이라는 경제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다시 획득함으로써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죠. 그걸 적극적 자유라고 말합니다. 앞서 언급한 예로 다시 돌아가면 삼성 타워팰리스에 실질적으로 신접살림을 차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이렇게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두 가지를 다 보장해 줍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소극적 자유만 강조해요. 적극적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의에 의해서 내가 강요당하지 않는 자유만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똑같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 사람이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보다 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죠. 가난한 사람을 향해, ‘너도 자유인이야 그러니까 자유를 맘껏 누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억압적인 자유인지 몰라요. 부자들은 그 자유를 가지고 자기 삶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자유란 그림의 떡에 불가한 것이죠. 이는 마치 아주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당신에게도 삼성 타워팰리스에 신접살림을 차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자본주의 경제체제 혹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보장해주는 자유란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겐 반쪽짜리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희년사상이라고 생각해요. 희년경제 하에서는 모든 사람이 50년을 주기로 해서 자기 몫의 땅을 확보하게 되잖아요. 그건 뭘 의미하냐면 모든 사람이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평등하게 갖추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는 토지가치공유를 넘어서야 된다고 봅니다. 물론 토지가치의 사유화가 해결되면 자본과 노동의 비대칭적 관계가 일정정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토지의 가치를 공유하게 된다고 해도 자본의 불평등한 배분과 그 본질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자본과 노동사이의 엄청난 힘의 불균형은 상당부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희년을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토지에만 적용하면 안 된다고 저는 보는 거예요.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토지 외의 각종 자본들에 대해서도 희년의 패러다임을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지가치의 공유뿐만이 아니라 자본가치의 공유까지도 시도하는 것이 저는 희년정신이다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한국사회에 적용한다면 재벌 및 대기업의 이윤독점 등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경제철학자는 예컨대 성인이 될 때 모든 국민들에게 일정한 자본을 나눠주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주자는 개념으로 보면 될까요? 

 

기본소득과 비슷한 거지만 이건 목돈으로(웃음). 기초자금을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거죠.  

 

희년의 두 번째 특징 - 회복

 

그리고 아까 회복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것도 굉장히 중요해요. 자기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든요. 저는 그것이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양극단을 뛰어넘는 비전이라고 봐요. 자본주의는 너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구소련식 공산주의는 지나치게 집단주의적이었어요. 

 

희년이 추구하는 것은 극단적 집단주의도 개인주의도 아닌 가족을 단위로 한 공동체주의입니다. 즉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역동적으로 협력하고 보완하도록 합니다. 개인이 공동체에 위협이 되지 않고 공동체가 개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그런 경제체제가 바로 희년사상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패러다임이라고 봐요.

 

그래서 그런 패러다임을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한다면,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집단주의와 자유경쟁시장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는 개인주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시장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가 힘을 적절히 나눠가져 서로 견제하고 협력해 나가는 정치경제체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시장도, 국가도, 시민사회도 독주하지 않고 이 세 영역이 적절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면 바로 희년의 패러다임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시장과 국가와 사회의 균형을 이야기한 칼 폴라니의 개념과 비슷해 보입니다. 희년실천에 있어서 주체도 무척 중요한 문제인데 국가와 시장만을 희년실천의 주체로 보는 것을 넘어서 시장과 국가와 사회를 주체로 모색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의 활성화, 소공동체의 연대체로서의 시민사회, 그런 흐름들을 자꾸 만들어가야 되는 거죠. 힘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와서 국가나 시장을 향해서 뭔가 말할 수 있는 그런 주체를 형성해야 하죠. 권력이 국가로 넘어갔다거나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식의 자조 섞인 말을 할 필요가 없도록 시민사회가 국가와 시장을 적절히 견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다’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께서 희년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제 기억으로는 희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천덕 신부님의 영향 같아요. 예수원 운동을 젊은 시절에 보면서 대천덕 신부님에게 굉장히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 분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에서도 살 줄 아고 땅에서도 살 줄 안다는 거에요.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도 뜨겁게 사랑하지만 정치․경제․사회의 현장에서도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고 그 분의 총체적인 신앙관이 저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어요. 

 

대천덕 신부님이 희년을 굉장히 강조를 했죠. 아마도 제가 희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천덕 신부님을 알게 되면서 부터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나 개인이 희년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새맘교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중산층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부동산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져요. 부동산을 통해서 이익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여지구요. 혹여라도 부동산을 통해서 수익을 얻는다면 그 수익은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든지, 시민사회단체에 기부를 하든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에 기여를 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희년경제를 오늘의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애쓰는 시민단체들도 있고 그런 꿈을 갖고 있는 정치인도 있잖아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런 시민단체나 정당정치에 참여해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에 자기 삶을 던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예컨대 토지가치공유를 위한 다양한 법률개정운동이라든가 헌법개정운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생기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희년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작은 공동체, 생활공동체들이 여기 저기 있는데, 자신에게 부르심과 은사가 있다면 그런 공동체에 자신을 던져보는 것도 세상을 변혁시켜나가는데 중요한 하나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교회로써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있죠. 일단 교회는 신앙교육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희년이 갖고 있는 신앙적, 경제적, 사회적 의미들을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알려주어서 내세, 내면, 영혼문제를 넘어 경제적 영역에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특히 가난한 사람들, 땅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희년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계속 가르쳐주는 신앙개혁, 의식개혁을 교회가 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저희 교회 같은 경우는 매주 예배 직후 애찬식을 합니다. 일종의 공동식사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서로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미각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죠. 저는 교회가 애찬을 회복하는 것도 희년정신을 이어가는 중요한 실천이라고 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일예배 후에 경제적,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토론을 해요. 지난번에는 ‘KTX와 인천공항 민영화’와 관련해서 성도 한분이 발제를 하고 제가 신학적으로 논평을 하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적 관점에서 경제적, 사회적 이슈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신앙적 관점에서 어떤 분명한 소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여 지고요. 

 

그리고 교회예산 활용이 굉장히 중요하겠죠. 저희 교회는 새맘공동기금이 있어요. 매년 천만원씩 마련을 하는데 누구든지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분이 요청을 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1회 50만원, 4회까지 생활의 어려움을 보충할 수 있도록 하죠. 그게 희년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방안일 것 같고요. 

 

그리고 보편복지를 확대한다는 개념에서 유치원 아이들과 고등학생들을 빈부에 관계없이 십만원씩 매월 장학금으로 제공하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만 도우면 낙인효과가 생기니까 우리가 다 동등한 존재로 서로서로 도와주는 평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 나눔의 궁극적 목표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빈부에 관계없이 유치원생과 고등학생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동산에 돈쓰지 않고 복지, 사회선교에 예산을 많이 쓰는 것 등도 희년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고 봅니다.

 

목사님께서도 주거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6년 동안 반지하방에서 생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희년정신에 입각한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그건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영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제가 혹시라도 서구문화의 풍요함 때문에 흔들리면 안 된다는 깊은 경각심이 있었어요. 내가 다른 건 못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저한테는 컸어요. 물론 개인적으로 돈도 없었지만(웃음).  

 

그래서 학사에서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신학을 공부할 때 최대한 가난한 동네에 살기로 결심을 했죠. 박사과정 할 땐 실업자들만 모여 사는 동네에서 살았어요.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업자들만 모여살 수 있도록 마련해준 주택단지이죠. 실업자들만 모여 사니까 서로 도둑질하고 심지어는 집에 불까지 지르더라고요. 저희 살던 집도 집을 비운 사이에 한 번은 침입을 당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적이 있지요. 정문엔 전봇대 같은 나무가 박혀 있었고요. 유일한 재산이었던 작은 칼라 TV를 가져갔고 기타는 부셔버렸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 상대빈곤의 문제, 실업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경험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에겐 집도 무료로 제공되고 기본적인 생활비도 지급돼요. 그 돈을 절약해서 사용하면 1990년대 당시 여름에 동유럽 정도는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사회적 불평등이 그 사람들의 자존감을 완전히 무너뜨려요. 직업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존감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동기를 아예 가질 수 없는 존재들로 전락합니다. 저는 그 때 실업과 상대적 빈곤이 얼마나 중요한 경제정의의 문제인가를 절감할 수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거주지도 그렇고, 내 삶의 여건도 그렇고, 가난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구요. 그렇지만 제가 아주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한때 한국에서 지하방에 산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때는 진짜 가난했어요. 뭐 제가 대단한 결단을 하고 지하방으로 간 건 아니고 진짜 실질적으로 가난해서 6년 동안 지하방에 살았죠.(웃음) 

 

희년함께에 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굉장히 외로운 길을 열심히 달려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고맙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고요. 제가 그동안 계속해서 보아왔거든요. 집요할 정도로 토지문제와 관련해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운동을 벌여온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효과와 관계없이, 그 길을 걸어온 자체만으로도 정말 훌륭한 사회참여를 해왔다는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앞으로도 종말론적 승리를 기대하면서 흔들림 없이 정진해주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희년경제 패러다임을 토지문제에만 아니라 자본문제에까지도 직접적으로 확산시켜나갔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게 희년함께가 지금 꼭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서로 분업을 해야 할 분야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적어도 희년경제 패러다임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자본에도 직접 적용되어야 한다는 흐름을 갖고 있는 운동과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희년운동을 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동문제가 토지문제만 가지고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자본과의 싸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해서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싸움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함께 해주는 그런 흐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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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총체성의 회복이 아직도 요원한 것 같아요. 아직도 한국교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희년경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사회참여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두 번째 우려되는 것은 로잔언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가진 자의 입장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그런 흐름이 생기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자본의 입장과 거의 일치하는 기독정당이라든가 기독시민운동은 모두 로잔언약을 기반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말이죠.

 

저는 로잔언약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로잔언약이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얘기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오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로잔언약도 좀 더 다듬어져야 된다고 보고요. 그래서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떤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로잔언약을 오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는 그런 위기의식을 갖고 있고요.

 

세 번째로는 한국교회가 대안적인 경제체제에 대해 경직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역사적 이유가 두 가지 면에서 있어요. 하나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 북한과 전쟁을 치른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했다는 자부심이에요.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상상력을 상실했어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함정 속에 빠져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보고 마음의 폭을 넓혀서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를 깊이 직시하고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좀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습니다. 

 

청년세대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선 첫째로는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청년세대들이 꿈을 마음껏 펼치면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치경제적 여건을 만들어 줬어야 되는데 스펙 쌓기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경쟁만능의, 시장만능의 사회를 물려준 것에 대해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굉장히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너무 미안하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얘기를 제일 먼저 하고 싶군요.  

 

두 번째로 청년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도무지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격으로 매겨 상품화하는 사회 속에서 청년들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자기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애써야만 되는 그런 현실이 얼마나 힘들까, 그런 고통에 대해 깊이 공감을 하고요.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기꺼이 세상에 저항하며 하나님나라의 길을 걸어갔던 그런 사람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구름떼 같이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으니까 그 응원소리를 듣고 정진하자 그런 얘기를 하고 싶네요. 

 

긴 시간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기도제목 있으시다면 나눠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얼마나 더 오래 살지 모르지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이웃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잘 지켜서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조금이라도 더 실천하는데 나의 삶을 아낌없이 던질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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