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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의 길 연재1] 요셉과 모세

작성자 : 희년함께 (58.120.230.***)

조회 : 649 / 등록일 : 21-03-04 20:30

[희년의 길 연재1] 

 

 

요셉과 모세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토지공개념

 

 

 

김덕영 / 희년함께 희년실천센터장

 

노예에서 왕까지 모두를 위한 요셉의 토지공개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이며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했다. 사람들은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복을 빌지만 우상은 도리어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이용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이웃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기를 원하셨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진 존재는 끝없이 의미를 추구한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우상에게 절하기를 강요받는 치열한 생존의 현상에서 참 하나님을 강렬하게 찾는 존재가 있었다. 그가 특별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지 않았을 뿐이다. 진리와 정의를 향한 근원적 열망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존엄한 존재에게 은닉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자신의 열망과 조우한 존재를 통해 창조의 정신이 이 땅에서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야곱의 아들 가운데 가장 촉망받고 사랑받은 요셉은 이집트의 노예로 끌려간다. 가장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던 요셉은 가장 비천한 존재가 되었다. 요셉은 노예 노동의 비참한 현실을 몸소 체험한다. 노예는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의 남루한 육체뿐인 존재에겐 땀 흘린 만큼의 정당한 대가는 기대할 수 없었다. 요셉은 반복되는 매일의 노예 노동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면 절망적인 무기력에 빠져 남은 삶의 가느다란 생명줄마저 놓을 수 있다. 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부르고 또 부르짖었다. 과연 그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느냐고 말이다. 

 

삶의 나락으로 던져진 요셉에게 어느 순간부터 여전히 비추고 있었던 따스한 햇살이 실감 나게 느껴졌을까. 지친 땀방울을 닦아내고 맞이하는 시원한 바람도 예전처럼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노예 노동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여전히 자신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요셉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요셉 안에서 일어난 내적 혁명은 그의 모든 관점을 새롭게 했고 그의 존재를 변화시켰다. 그가 하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 아니라 창조 섭리를 깨우친 청지기의 일이었다. 존엄한 존재됨을 자각한 사람이 만들어내고 기획한 모든 일에서 빛이 났다.

 

스스로를 노예로 여기지 않는 요셉을 그 누구도 노예로 취급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더욱 신임했고 그에게 많은 책임이 부과되었다. 요셉은 그야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보디발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다.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것이다. 요셉은 그렇게 신임받는 존재로 보디발의 집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법도 한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것으로만 머무를 수 없었다. 다시 요셉 개인의 삶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고난을 거쳐 이집트 왕 바로 앞에까지 나아가게 한다. 아무도 해석할 수 없었던 바로의 꿈을 요셉은 해석해내고 다가오는 국가 재난의 방책까지 제시한다. 요셉이 마주한 삶에서 누적된 지혜에는 이집트의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실마리가 담겨있었다.

    

요셉이 제시하는 해결책에 바로는 기꺼이 그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에게 준다. 이집트의 전권을 그에게 넘긴 것이다. 이집트에 노예로 들어온 존재가 전권을 가진 총리대신이 되었으니 그 자체만으로 놀랄 일이지만 요셉의 지위 상승에 집중하여 요셉의 성실하고 치열한 신앙에 하나님이 복에 복을 더한 인물로만 주목하기에는 그 내용이 더 깊고 의미심장하다. 한 사람의 생각과 철학은 한 순간의 임기응변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오랜 문제의식과 누적된 성찰이 있어야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 있고 그 해결책 또한 수반되기 마련인 것이다. 요셉은 노예 노동의 처참한 현실을 머리가 아닌 체험으로 몸에 각인한 사람이었다. 재산과 땅을 잃은 사람들은 가족공동체를 지킬 수 없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노예노동으로 근근이 삶을 유지하는 것만을 겨우 희망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요셉은 인장 반지를 자신의 권력과 부를 탐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가 기껏해야 자신의 복만을 구하는 존재였다면 노예 노동을 거쳐 총리대신에 이르렀다 해도 자신의 권력과 부를 누리기에 바빴지 노예 노동에 시달리거나 노예로 전락할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향한 인류애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도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아야 한다. 답은 언제나 해볼 수 있는데 까지만 하는 존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병에 든 자녀를 반드시 살려야 하는 부모의 심정, 끼니를 걸은 친구에게 반드시 밥을 건네주고자 한밤중에라도 체면 불고하고 옆집의 문을 두드리는 심정, 상위의 음식은 구하지 못하더라도 바닥에 떨어진 부스라기 라도 구할 수 있는 낮아진 심정만이, 그 절박함만이 답을 찾을 수 있다. 요셉에게는 그러한 간절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요셉에게 위기는 자신만이 아닌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기회였다.

 

요셉은 주도면밀하게 이어지는 7년 풍작 기회를 살려 곡물을 다량 확보하여 7년의 가뭄을 대비한다. 계속되는 흉작과 가뭄으로 이집트와 인근 주민들은 모두 식량이 동이 나고 곡물 가격이 치솟는 상황이 발생하자 요셉은 자본과 땅을 합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요셉은 제국 통치자의 대리인으로서 국가 권력이 비대칭적으로 증대된 상황에서 식량 위기에 내몰린 이집트 백성과 가난한 사람들의 남겨진 모든 재산과 땅까지 제국의 소유권 아래 둔 셈이다. 요셉은 제국주의자로 곧잘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어지는 요셉의 조치를 생각할 때 과연 요셉의 방향성이 제국의 잇속만을 챙기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계속된 가뭄의 위기를 통해 요셉은 이집트의 모든 땅을 국유화할 수 있었다. 이후 요셉은 백성들에게 20%의 토지임대료(소출의 1/5)를 부과한다. 이집트의 바로 왕만이 실질적 토지소유권자이며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대지주가 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오늘날 토지임대료에 해당하는 소작료가 소출의 1/5에 해당하는 조치가 얼마나 사회경제적으로 혁명적 조치였는지를 엿보려면 멀리 갈 것도 없다. 조선말 병작반수제는 지주에게 소출의 1/2를 소작료로 납부해야 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도 소작료는 50%가 기본이었고 많게는 60~80%를 지주에게 납부해야 했다. 해방 직후 나라만이 아니라 전 국민의 80%에 해당했던 소작농의 억눌린 경제형편도 해방이 필요했다. 발 빠르게 1946년 북한은 3월 한 달 만에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남한 역시 소작인들의 억눌린 마음을 풀어주지 못하면 좌익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군정의 요구와 조봉암 농림부 장관의 열정으로 1950년 3월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단행되었다. 

 

근대국가가 탄생한 이후에도 대지주 및 중소지주에게 시달리는 상황이 많았는데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이미 토지 임대료를 20%로 부과했다는 것은 이집트 민중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주들에게 늘 시달리는 마음을 가졌던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20%의 토지 임대료 납부는 매우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들은 나머지 80%의 소출을 자신의 것으로 생산하고자 더욱 땀을 흘렸을 것이다. 요셉은 정확하게 토지 공개념을 당대 맥락과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 노동 상황에서 벗어난 내적 혁명을 사회적 차원에서도 제시했다. 노예임에도 스스로 존엄을 발견한 요셉은 사회 모든 구성원의 비통함을 해결하였다. 요셉은 자신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통해 히브리 공동체의 기아 위기를 해결하고 새로운 삶의 거처를 제공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를 살리고 이집트의 다수 민중에게도 더 나은 삶의 길을 제시했다. 그 삶은 조금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쁜 소식으로 가난한 이집트 백성에게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물론 한계는 존재한다. 제국의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서부터 누적된 문화와 철학을 바탕으로 한 제도 변혁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동적인 상황은 언제든 도래할 수 있다. 요셉은 그마저도 인지한 듯 유언을 남긴다. 자신의 유골을 이집트를 떠날 때 꼭 같이 가지고 가 새로운 땅에 함께 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에서 말이다. 요셉에게 이집트는 새로운 비전의 땅을 향한 임시 거처였을 뿐이다.  

 

새 나라의 질서를 토지가치공유 토대위에 올린 모세

 

요셉을 모르는 이집트 왕이 들어서자 고센 땅에서 번창하고 있었던 히브리 백성에게도 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제국의 정치적 상황이란 왕에게 전권이 있다 보니 왕의 시혜적 조치가 왕이 바뀜에 따라 언제든지 착취적 상황으로 급변할 수 있다. 제국은 그야말로 대중을 언제든지 억압할 수 있는 통제되지 않는 리바이어던이다. 히브리 백성의 빠른 성장세는 새롭게 등장한 정권의 위협으로 인식되어 존중받는 주권자 백성이 아닌 노예적 노동인력으로 히브리 백성들의 처지가 바뀐다. 심지어 반인륜적 산아제한까지 가해진다. 제국의 안위와 이익에 반하는 생명은 모두 도구화되는 위기 앞에 다시금 하나님의 대안은 한 존재를 통해 움트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여 버리라는 반생명적 조치에 맞서 모세의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사랑의 존재를 숨기고 숨기다 요게벳은 역청을 바른 갈대상자에 모세를 숨겨 나일 강에 띄운다. 그 연약한 한 존재를 하나님과 신음하는 히브리인이 숨죽이며 주목하였다. 신비한 손길이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져 바로의 딸의 아들로 성장하게 한다. 자신의 친 어머니였던 유모의 손길에서 자란 모세는 이집트 왕가의 자제가 아닌 히브리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모세의 눈에 히브리 노예들은 원래부터 노예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 자신과 동등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빚어진 형제들이었다. 그들의 억압받는 현실이 모세의 눈에 들어온다. 바로의 눈부신 권력, 하늘과 맞닿을 듯 높은 제단은 기실 히브리 노예들의 피와 땀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의 채찍은 오늘도 히브리 노예들을 향해 거침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모세는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인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이집트 병사를 향한 분노가 그를 휘어 감았다. 이집트 병사를 향한 모세의 주먹은 기실 제국의 통치자 바로를 향한 것이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범죄 사실이 발각되자 곧 광야로 몸을 피한다. 열정도, 학문적 준비도 있었던 모세에게 광야의 시간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간이었다. 떨기나무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만만한 청년이 아닌 자격 없는 존재로 하나님의 사명을 마주한다. 독재적 리바이어던 이집트 제국은 히브리인의 사회적 결집과 역량 강화를 통한 새로운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생성될 어떠한 틈도 주지 않았다. 고대 근동의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집트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종교권력으로 상징화된 제의 구조는 민중의 상상력마저 통제 가능했다. 히브리인의 자유와 해방은 오직 탈주만으로 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어떻게 탈주한단 말인가. 감히 아무도 꿈조차 꿀 수 없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상상력을 제약한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구상을 모세에게 제시한다. 히브리인은 더 이상 노예 노동이 아닌 자신의 땅에서 땀 흘린 정당한 대가를 누리고 제국의 질서만을 숭상하는 거짓 제의를 걷어치우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이다. 바로의 완고함을 통해 이집트의 모든 제의적 상징물의 허구가 드러난다. 제국이 섬기던 모든 우상이 이제는 모든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 되었다. 바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을 잃고 나서야 제국의 탐욕을 잠시 내려놓는다. 그간 그의 명령에 따라 죽어야 했던 무수한 이 땅의 아들들을 향한 탄식과 절망을 그는 떠올려야 했지만 모세를 향한 분노와 원망으로 채워진 마음은 부서지지 않았다.

 

히브리 노예의 탈주를 명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노예 노동에 시달리는 모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새로운 나라의 계약을 하나님과 체결한다. 그 나라는 또 하나의 이집트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탈주한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노예 노동을 기반 삼은 모든 부와 권력을 거부하여야 한다. 누군가를 착취해서 유지하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 또 다른 노예가 나오지 않는 사회여만 했다. 7번째 날 모두가 안식한다. 사람뿐 아니라 가축과 짐승도 쉬어야 한다. 나의 안식이 아니라 이웃의 안식을 보장해야 한다. 노예가 어떻게 노예가 되는가. 땅과 터전을 잃은 존재가 노동의 대가로는 고금리를 감당하지 못할 때 남은 육체마저 팔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7년의 안식년에는 그간의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저당 잡힌 모든 노예에게 해방을 선포했다. 7년의 안식년이 7번 도래한 49년의 다음 해인 50년에는 희년을 선포해 자신의 기업으로 모두가 돌아가게 했다. 땅과 터전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 노예 노동의 삶이 세대를 이어 계승되지 않게 했다. 오직 계승해야 할 것은 시내산 계약의 정신이다. 모두가 자신의 땅과 기업에서 땀 흘린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누리고 모두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 아래 안연히 거하는 나라이다.

 

모세는 그간 고민해 온 모든 것을 쏟아부어 새 나라의 헌법과 시스템을 고안했다. 어떻게 새 나라의 철학과 가치를 지속적으로 녹여낼 수 있을까. 고대 근동의 정치집단들도 새 왕권이 출범할 때 부채탕감과 토지분할 조치를 간헐적으로 취했지만 일회적 정치 이벤트였다.  반면 모세는 토지의 공적 사상을 세대를 거듭해 유지하고자 했다. 희년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한 번의 개혁으로만 유지될 수 없다. 제의 질서를 구조화하고 일상의 희년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수시로 상기시키고자 했다. 안식일의 정신을 통해 노동권을 보장하고 안식년을 통해 노예 노동의 영속화를 끊어내야 했으며 누적된 안식년의 경험과 문화는 가장 힘든 희년 실행을 통해 각자의 땅과 기업을 원래 분배된 평등한 상태로 유지시켜야 했다. 일련의 순환을 이어갈 수 있는 제의는 제국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그것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제의적 삶의 가장 큰 목표는 야훼와 같이 거룩해지는 것이었다. 희년의 질서로 구조화된 제의에서 강조하는 거룩은 오늘날의 평등과 공평의 개념으로 치환될 수 있다. 

 

가나안 땅의 새로운 나라는 이집트와 전적으로 다르게 작동하는 나라이다. 권력과 부 그리고 제의를 독점한 바로와 이집트 귀족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자기 땅을 가진 자유 농민이 자기가 땀 흘린 만큼 정당한 대가를 누리고 또한 다른 누군가의 땀 흘린 노동을 존중해야 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소수의 권력자가 기획해서 완성하는 나라가 아니라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으로 구조화된 일상의 거룩이 누적되어야만 완성되는 나라이다. 모세만의 비전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꿈꾸어야 하는 비전이 될 때 가능한 나라이다.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은 대신 이스라엘의 비전이 담긴 율법을 밤낮으로 가르치고 일상의 제의를 집행하며 시내산 계약을 이스라엘 몸에 새긴다. 레위지파에게는 땅은 없지만 다른 지파 땅의 소산의 1/10인 십일조가 주어진다. 이스라엘은 땅을 가진 자나 땅을 가지지 못한 자나 토지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를 이룬다.

 

제국의 질서에서는 거룩한 희년의 나팔이 구조적으로 울려 퍼지기 어렵다. 왕과 귀족의 권력은 강력한 상비군과 상징화된 대형 제의 구조물로 유지된다. 이 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독점화된 토지 자본과 노예 노동이 주춧돌이 되어야 했다. 이스라엘은 제국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 종교와 제의 권력을 독점하는 왕이 아니라 거룩한 제의 질서를 사회경제적 평등의 질서로 결합한 민중 자치적 질서를 도모했다. 바로 왕의 권력체제를 계승하기 위해 죽음마저도 신성화시킨 피라미드는 이집트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계승되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비록 자신이 꿈꾸고 열망하고 설계한 나라기도 했지만 자신의 존재가 신성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는 하나님의 비전에 자신의 시체마저도 은닉시킨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무덤을 크게 지을 필요가 없다. 웅장하고 비범해 보이는 성전도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 무화과나무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정다운 이웃과의 담소가 중요한 사회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던 요셉과 모세는 토지의 공적 가치를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고 적극적으로 기획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철저한 섬김과 자기 비움으로 출발해 모든 생명을 살리는 길을 찾고 또 찾았다. 또한 그 철학과 양태는 제국의 통치자가 대부분 걸어간 탐욕과 권력의 독점적 길과 대조되었다. 요셉과 모세가 꿈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스라엘이 걸어가고자 한 길이 되었고 다시 예언자의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이상향의 원형이 되었다. 그 길은 철학자가 열망한 추상화된 이데아가 아니라 가장 비천한 존재의 신음에서 출발해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노래한 구체적인 현실의 길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가난한 자에게 희망이 보이고 함께 살 비전이 발견되었으며 열심히 땀 흘리는 자유 농민의 나팔 소리가 가나안 땅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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