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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게임 룰 바꾼 '안티-부루마블' / 김재광

작성자 : 희년함께 (59.7.226.***)

조회 : 1,649 / 등록일 : 20-12-10 16:34

 

 

 

부동산게임 룰 바꾼 '안티-부루마블'

 

 

 

김재광 / 희년은행 총괄팀장

 

부루마블의 추억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책장과 천장 사이 빈 공간에는 늘 익숙한 종이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은 안 꺼내본 것 같은, 그래서 먼지만 켜켜이 쌓여 있는, 그렇다고 막상 버리기에는 좀 아까운, 그러니 한쪽 귀퉁이에 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 상자 겉표지에는 크게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부루마블, 원래 'Blue Marble(블루마블)'인데 한글로 옮겨 적으면서 부루마블이 되었다. 미국의 모노폴리 게임을 본떠 우리나라에서 만든 보드게임이다. 굳이 '부루마블'이라고 한글 표기를 한 것이 지금에 와서 보니 좀 생뚱맞기는 하다. 그냥 블루마블이라고 적어도 될 것을. (찾아보니 '부루'가 'Blue 블루'의 일본식 영어 발음 표기였다 한다. 여러모로 어색한 명칭이다.)

 

1980년대 초반 출시된 이후로 십수 년은 고스톱, 윷놀이에 버금가는 명절 가족 놀이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보드게임 좀 한다 하는 이들 사이에서 '아웃 오브 안중'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원작 모노폴리가 게임의 전략적 요소들을 여럿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이 게임으로 넘어오면서 단순 복불복 주사위 게임으로 전락한 점이나, 최근에 와서는 그 자신이 원작에서 게임의 대부분을 차용했음에도 난데없이 후발 주자 '모두의 마블'에 저작권 소송을 벌인 것 때문이라는데, 실은 이보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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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마블, 모노폴리 게임은 1904년 엘리자베스 매기 여사가 만든 '지주게임'을 본떠 만든 것들이다. 사진은 지주게임 원본 모습. 실제 마을을 지도로 삼아 만들어진 게임 버전도 있었다. 

 

표절은 표절을 낳고

 

부루마블이 모노폴리의 아류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루마블만 모노폴리를 따라한 것은 아니다. 모노폴리의 아류들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심지어 아류를 따라한 아류도 나오고, 그 아류들끼리 서로 소송전까지 벌이는 판국이니. 그야말로 표절과 모방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아류들의 원작 모노폴리 역시도 청정 순수하기만 한 효시 게임은 아니었다. 모노폴리마저도 사실은 표절 게임이었던 것.

 

1904년 미국 엘리자베스 매기 여사는 'The Landlord's Game(지주게임)'이라는 이름의 보드게임을 출시한다. 게임의 규칙과 방식은 예상하는 그대로이다. 보드판 위에 있는 도시들을 참가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각자의 말을 가지고 여행한다. 누구보다 먼저 A라는 도시에 도착한 사람이 게임 시작 때 받은 종잣돈을 가지고 그 A라는 도시(토지)를 사서 건물을 짓는다. 다른 참가자들이 A에 도착하면 땅주인(지주)은 임대료를 받는다.

 

승자를 가리는 법 역시 익숙하게 해 왔던 방식 그대로다. 땅을 많이 가질수록 임대료 수익은 그만큼 늘어난다. 어떻게 하면 비싼 임대료를 거둬들일 수 있는 곳을 선점하고 적절히 투자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내가 승자가 된다는 것은 곧 다른 참가자들은 파산을 한다는 뜻도 된다. 이것이 게임의 주된 룰이자 승리 전략이다. 그 아류들, 모노폴리, 부루마블도 이 룰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되도록 땅을 많이 차지하고, 임대료를 비싸게 받아서, 결국에는 남을 파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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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매기 여사는 <진보와 빈곤>을 쓴 헨리 조지에게 영향을 받아 지주게임을 만들게 되었다. 사진은 EBS 지식채널e '두 개의 게임' 편 갈무리. 

 

뒤바뀐 부동산게임의 룰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원본 지주게임에는 한 가지 룰이 더 있었던 것. 이제부터는 부루마블, 모노폴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좀 생소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지주게임은 또 하나의 부동산게임의 룰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토지에 대한 독점 규제. 게임 이름이 지주게임이고, 모노폴리라는 말 자체도 독점이라는 뜻인데, 독점 규제라니? 언뜻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실마리는 지주게임 원작자 엘리자베스 매기, 그리고 그가 참고한 20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쓴 책 <진보와 빈곤> 속에 담겨 있다. 매기 여사는 헨리 조지가 펴낸 <진보와 빈곤> 속 아이디어를 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파하고 싶었다. 헨리 조지는 말한다. 토지는 공공재인데 소수의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 토지로부터 발생한 불로소득이 소수의 지주들의 배를 불리게 할는지는 모르나, 절대다수의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토지 불로소득 구조의 폐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고. 매기 여사도 이러한 토지 독점 구조의 병패를 지적하기 위해 보드게임을 만들었고,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지주게임'이었다.

 

말하자면, 지주게임은 토지 독점 구조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제작된 게임이었던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부동산게임의 룰을 모두 경험하면서 무엇이 더 나은 세상인지를 자연스럽게 알아가도록 설계가 되었다. 이것이 모노폴리, 부루마블로 넘어오면서 원작자의 의도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독점 구조를 찬양하고 그야말로 땅따먹기에만 매진하는 게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매기 여사는, 그리고 헨리 조지는, 자신들이 공 들여 만들어 놓은 작품이 누군가의 훼손에 의해 지금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나돌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이 터지고 기가 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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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주게임의 본래 취지를 복원하기 위해, 최근 '희년함께'는 보드게임 '두 개의 세상'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시할 계획이다. 

 

안티-모노폴리, 그리고 안티-부루마블

 

모노폴리가 토지 독점을 장려하는 게임으로 탈바꿈하여 널리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수십 년 세월이 지나 1974년 미국에서 '안티-모노폴리' 게임이 출시되었다. 경제학 교수였던 랠프 앤스패크는 모노폴리 게임에 반대하는 새로운 게임을 하나 만들게 된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이미 유명세를 탄 모노폴리가 어떤 게임을 모방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뒤늦게 모노폴리의 원작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낸 것도 랠프 앤스패크 교수였다. 자신이 만든 '안티-모노폴리' 게임에 저작권 소송을 건 모노폴리 제작사에 맞서기 위해 이 보드게임의 역사를 파헤치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 진실의 역습이 아닐 수 없다.

 

안티-모노폴리 게임이 출시된 지 46년, 지주게임이 만들어진 지 116년이 흘러, 우리나라에서도 모노폴리 부류의 보드게임들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모노폴리, 부루마블 자체가 표절 게임이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의 것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지난 11월 24일 보드게임 '두 개의 세상'이 크라우드펀딩에 오르면서 출시를 예고했다. '희년함께'에서 만들었고, 12월 말까지 펀딩을 받아, 1월 중순 이후로 제작이 완료된다. 계보로 보면, 안티-모노폴리의 한국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안티-부루마블'이라고 해도 되려나?

 

모노폴리와 부루마블은 원작의 중요한 요소를 외면했다. 아니, 핵심이 되는 본질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한 시절 보드게임 판을 주름잡았다. 그런데 이 시기는 묘하게도 미국과 한국에서 부동산 광풍이 불어닥치는 시기와 겹친다. 보드게임 속 부동산게임의 룰은 현실에서도 기가 막히게 먹혀 들어갔다. 이것은 우연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엘리자베스 매기가 만든 원작 지주게임은 이런 현실을 예견이나 한 듯 부동산게임의 룰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냐고 이미 116년 전에 반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났다. 반쪽짜리 부동산게임의 룰이 지배했던 시절도 언젠가는 저문다. 이번에 출시될 보드게임 '두 개의 세상'은 원작 지주게임이 던진 질문에 대한 100년 만의 응답이 될 것이다. 감춰진 뒷 면의 게임을 다시 복원하면서 말이다.

 

 

보드게임 '두 개의 세상' 펀딩 참여하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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